
음험한 악귀와도 같은 월인은 반짝이는걸 좋아한다. 그렇게도 보석에게 집착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월인은 밤에는 나타나지 않아 어두운 장막 속에서도 평온하다. 고요하게 포도빛이 깔린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은 신샤가 움직이기 딱 좋은 시간이었고, 오늘도 신샤는 웅크리고 있던 캄캄한 동굴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황금색 모래가 깔린 부드러운 해변가를 거닐었다. 몇걸음 걷다가, 자신의 뒤를 밟는 인기척에 한숨을 내쉬었다. 빠르게 쫓아온 발걸음의 주인공은 신샤의 등이 가까워지자, 눈치를 보듯 살금살금 조심스러워진다.
"또 무슨 일이지?"
어미새를 쫓는 아기새처럼 신중한 걸음걸이. 신샤는 그가 누군지 안다. 미련할 정도로 신샤를 쫓아다니는 유일한 존재.
"포스포필라이트."
듣기 편안한 저음이 포스의 청각을 자극시킨다. 자장가를 불러주면 잠이 솔솔 잘 올 거 같은 잔잔한 목소리. 말 몇마디라도 놓치기 싫고, 더 듣고 싶어서 의미없는 대화를 부추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우울한 정막감 속에서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슬아슬한 심리 상태가 바들바들 몸을 떨 정도로 불안해서 얇은 실크 천같은 꿈을 꾸고 일찍 깨어났다. 헉헉 - 들숨 날숨을 힘겹게 내쉰 포스는 보게 된다. 눈앞에서 신출귀몰한 사악한 월인에게 공격당해 무수한 파편으로 조각나 빼앗긴 동료를. 안개처럼 뿌옇던 시야가 그 장면만큼은 선명하게 각인된다. 분노로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그 상황에서 움직이지 못해 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포스를 어두운 낭떨어지로 추락시킨다. 꿈의 연장선까지 보고나니 정신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포스는 비틀비틀 자신의 안정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곁에 있게 해줄래? 신샤."
그게 바로 신샤다. 신샤는 그 말에 몸을 움찔 떨었다. 달콤쌉쌀한 초콜릿처럼 포스는 신샤를 유혹하고 부추긴다.
환한 대낮에 보게 되면 반짝거리는 포스의 박하색 머리가 밤에는 은은한 청록빛을 띄운다. 늘 쓸모없다고 모진 말들로 상처를 줬어도, 신샤는 안다. 포스에게 얼마나 많은 장점이 있는지.
포스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으며, 순진하게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말들만 전해준다. 종달새처럼 쫑알거리는 작은 벚꽃색 입술도, 해맑은 천진한 웃음소리도, 항상 씩씩하고 의젓해서 엉뚱한 짓을 저지른 나머지, 타인을 곤란하게도 만들지만 밉게 보이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만큼 포스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전투를 준비하는 보석들 중에서 가장 약했던 존재이면서도 귀여운 동생처럼 사랑스런 존재다.
밤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볼을 간지럽히고, 자주빛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낀다. 신샤는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빛이 쏟아지는 검은 보라빛 하늘은 포도주처럼 기억에 오래도록 남게 강렬하게 아름다웠지만, 낮엔 자신을 보고 공포에 떠는 이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지내는 신샤에겐 눈부신 햇살과 들꽃의 향기는 어떤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럴 때, 포스는 기적처럼 나타나 신샤에게 밤의 즐거움보다 더 즐거운 일을 찾게 해주겠다는 의기양양한 소릴 하였다. 당연히 그건 영웅심리에 빠져든 포스의 허세였다. 그럼에도 신샤는 신보다 포스를 믿고 싶었다. 의지하고 싶었다. 항상 진심을 담아서 얘기하는 포스가 자신을 구원해 줄거란 생각에.
신샤가 뒤돌아본 포스는 바다처럼 깊고 진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달빛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속눈썹. 여전히 예쁜 박하색인 머리를 제외하면 그는 달라졌다. 아이같이 마냥 밝던 모습에서 벗어나 고독해 보였다.
"있지, 신샤."
휘이잉 불어오는 바람 소릴 제외하면 공허하던 침묵을 깬 건 속삭이듯이 말하는 포스의 은밀한 고백.
"널 보면 안심이 돼."
"그래서? 용건이 뭐냐고."
"내가 너와 친구가 된 건 행운이였어."
정말 기뻐-. 황홀한 어조로 말하는 포스로 인해, 신샤는 더이상 까칠하게 굴지 못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늘밤. 널 끌어안고 자고 싶어."
"누구 맘대로..."
말끝이 미세하게 들릴 만큼 작아진다. 맹수처럼 포스를 노려보고 강하게 거절했어야 하는데도, 이미 포스를 맘에 두고 있는 신샤에겐 무리였다. 그 사실을 여태껏 모르고 세찬 바람처럼 지나친 포스가 드디어 눈치채고 맑고 청아한 웃음소릴 낸다.
포스는 두 팔을 뻗어 신샤를 자신의 품안에 가뒀다. 맞닿은 살결은 쌀쌀한 밤의 기온도 물리칠 만큼 따스했다. 심장이 쿵쿵 터지기 일보직전인 시한폭탄처럼 요란하게 뛰어대며 서로에게 향하는 감정이 어떤지 힌트를 준다. 아아, 이건 분명 그거다. 누군가 낸 퀴즈에 대한 정답을 적은 거처럼 뿌듯한 기분이 든다. 사랑이야.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달달함이다. 포스는 예전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렇게 외쳤다.
"내 사랑이 너라서 다행이야!"
"무슨 뜻이야?"
"신샤라면, 날 믿고 따라와 줄 거 같거든. 내 파트너로서 말이야."
파트너. 애초에 필요없다고 생각하기 보단, 누구든 자신과 함께 있기 싫을 거 같았다. 무모하고 정이 많고 자신을 떠올리며 사랑해주는 포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자신은 평생 외톨이였겠지. 혼자는 익숙한데,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젠 눈물이 나올 만큼 쓸쓸한 건 싫었다.
"날 책임져."
정말,
"물론이지."
서로를 놓치기 싫은 밤이다.